|  | | | ↑↑ 부호리 입구에 있는 허병률 의사 공적비 비문. | | ⓒ 경산신문 | | 독립운동가 허병률(許秉律)은 하양읍 대곡리 하양 허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5년(고종22)에 태어나 해방을 3년 앞둔 1942년 12월 2일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했다. 허 의사는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 채기중(蔡基中) 유창순(庾昌淳) 등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박상진(朴尙鎭) 우재룡(禹在龍) 등과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였다. 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혁명계획은 군자금 수합,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투쟁으로써의 총독 처단 계획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허 의사는 군자금 수합활동을 펴다가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피체되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음력 9월경 양한위(梁漢緯)·권태일(權泰鎰)로부터 독립신문, 경고문 등의 문서를 교부받아 자산가와 관공리들에게 우송하며 민족의식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0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집에 힘써 모금한 8000원을 소지하고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해 8월에 박용선(朴容善) 조한명(趙漢明) 이동찬(李東燦) 등과 군자금 모집을 모의하고 권총과 탄약을 휴대, 서울 서린동에 사는 엄홍섭(嚴弘燮)을 설득하여 2만원을 군자금으로 교부받아 즉시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군자금 수합활동을 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1년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다. 경성복심법원은 1921년 8월 8일 허 의사 등의 항소를 기각해 형을 확정했다. 복심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33세였던 허병률(하양읍 부호리 129번지)은 상해가정부(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부호들을 협박, 강취했다고 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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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심판결문에 따르면 허 의사는 1920년 8월 7일 밤 경성부 원동 이원찬의 자택 및 관철동 중국요리점 신원춘에서 박용선 이동찬 조한명을 만나 조한명의 친족인 경성부 서린동 엄홍섭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모금하라는 지시를 받고, 다음날 9일 이동찬의 집에서 6연발 총 1정, 탄환 6발,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명의의 애국금 납입통지서 용지 등을 연철한 장부 1책을 받았다. 허 의사는 권총과 장부를 소지하고 9일 오후 6시 종로통 종로전차 정거장에 도착하여 미리 지정한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또 조한명이 산보를 핑계로 엄홍섭을 데리고 나와 위 정거장에서 허 의사에게 이를 알리고 사라졌다.
허 의사는 엄홍섭을 뒤따르다가 종로 2정목 길가에서 할 말이 있다며 장교정 중국요리점 화안거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어 자신을 상해임시정부에서 온 독립운동자금 모집원이라고 소개하고 휴대한 권총과 탄환을 내보이며 조선독립자금 2만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허 의사는 자신은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며 엄홍섭을 협박, 그 자리에서 2만원을 납부하겠다는 약정서에 서명 날인하게 했다. 1928년 출옥하자 일제가 전답으로 회유했으나 거절하고 다시 상해로 망명했다. 이듬해 언론을 통한 지하운동 사명을 받고 재입국, 조선일보 대구지국 총무로 일하며 때마침 광주학생운동이 10월에 일어나자 영남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격문을 조카인 동훈을 시켜 살포하려다 동훈이 체포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37년 대한광복회 옛 동지 우재룡(禹在龍) 등과 지리산에 들어가서 학생과 민중의 봉기를 획책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다음해 고향으로 돌아와서 하양읍 대곡리 산중에 은신하여 청소년 정신계도에 주력하다가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독립운동에 바친 56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허 의사 사후인 1963년 3·1절에 대통령 표창인 건국공로상이 추서되었고, 하양 부호리 앞에 의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역주민 및 학생들이 성금을 모금, 공적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포장(196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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