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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갔으나 김 진 국
2018년 11월 04일(일) 16:01 [경산신문]
 
남북 정상은 물론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가세한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로 가득 찼던 한반도의 무술년도 벌써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불가마와도 같던 여름 더위에 연이은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탓인지 오색으로 물든 단풍 빛깔이 유난히 곱다. 평화와 화해로 버무린 빛깔이 바로 이런 색상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보는 눈이 즐겁다.

그런데 먼 산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현실을 들여다보면 평화와 화해는커녕 사회 구석구석에서 혐오와 증오의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다. 게다가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증오심이 상대에 대한 차별과 학대의 수준이 아니라 툭하면 칼부림로 이어지는 참사로 이어지고 있다. PC방 알바생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이어 손녀의 옛 애인에 의해 할머니를 포함한 일가족이 난자당하기도 하고, 부모들 사이의 상견례를 앞둔 예비신부가 혼수문제로 예비 신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카페회원들의 신상털이에 무방비로 노출된 보육교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태풍 때문에 해외 관광지에서 발이 묶여버린 관광객들에 대한 비난과 야유도 도가 지나친 것 같다. 트집 잡을 만한 사건만 벌어지면 악성댓글로 온라인은 벌겋게 달아오른다. 거기에 가짜뉴스까지 가세하여 굶주린 하이에나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듯 네티즌들의 증오심에 불을 지피고 있는 형편이다. JSA의 비무장조치도 완료되어 이달부터 자유 왕래가 가능할 것이라는데 남측 사회 내부의 성별, 계층별, 지역별, 세대별 갈등과 반목은 그 골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고, 이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참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모든 부조리와 패악의 배경에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는 고용상황과 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져있다는 사정이 있겠지만, 이런 사정이 단기간에 호전될 전망이 없다는 좌절감과, 앞으로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는 특히 젊은 층에게는 허무주의를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이라는 말이 젊은 층 사이에 회자되는 것을 그들의 자조적 해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회의 통합을 가로막는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경력과 특권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양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수도권을 물끄러미 쳐다만 볼 수 있을 뿐 무슨 특단의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 절망과 좌절로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증오와 분노가 들끓게 마련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 한국사회는 낡은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교차점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2년 전 이맘때부터 한국사회의 저녁을 밝혔던 촛불의 열기는 보수임을 참칭하며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한국사회를 지배해왔던 세력들의 역할이 다했음을 알리는 봉홧불 같은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한 세기의 맏이가 되어 달라는 소망들이 모여 만들어낸 정권이다. 그러나 낡은 것은 여전히 앙버팀을 하고 있고 새로운 것은 오지 않는 혼돈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 혼돈이 지속될 때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경제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이 열어젖히는 것이다. 지난 한 세기는 결과가 모든 수단을 합리화하고, 힘이 곧 정의로 인정되고, 그 힘이 가진 폭력이 정당화되던 시대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참극은 이런 낡은 가치관에 뿌리가 있는 것이다. 낡은 것을 해체하고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역할도 결국은 시민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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