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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원의 행복
문학_삶과 사람의 무늬 <59>
2019년 07월 18일(목) 10:56 [경산신문]
 
시청 안에 있는 은행을 자주 들른다. 은행 볼일이 그다지 없어도 거의 매일 아침 그곳을 들른다. 단돈 이백 원만 투입하면 따끈따끈한 커피 한잔이 “네, 주인님” 하고 내 앞에 우뚝 선다. 어릴 적 동화 속 주인공 알라딘이 된 기분이다. 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의 실루엣은 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에 머물고 두 눈은 저절로 지긋이 감긴다. 괜히 설렌다. 좋은 일이 생겨 행복에 겨운 솔로가 된 것 같다. 솔로가 사는 집은 언제나 은은한 헤이즐넛 향이 머문다는 누군가의 솔로 예찬을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일과 육아에 지친 그즈음에 솔로가 살짝 부럽기도 했다.

식구들 다 내보내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보건소로 향한다. 나도 드디어 솔로가 되었다. 주민 건강을 위해 무료로 스트레칭 관리를 해준다. 운동이 끝난 후 가끔 건너편에 있는 시청에 들른다. 컴퓨터를 비롯한 인쇄기, 심지어는 복사용지까지도 무료로 제공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집에 있는 인쇄기가 고장이 나서 난감해하던 차에 수리할 때까지 톡톡히 득을 보기도 했다. 은행 입구의 지급기 앞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어디선가 흘러온 부드러운 바닐라 향이 중추신경을 건드렸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향이다. 내가 한때 무척이나 좋아했던 헤이즐넛 커피 냄새가 틀림없었다. 그 근원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은행 안 한쪽 귀퉁이에서 자동 커피 판매기 한 대가 차분히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이백 원을 투입구에 넣는다.

‘커피 조제 담당은 누가 할까. 여직원들이 당번을 정해서 할까. 아니야, 요즘은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을 거야. ’ 옛날 그 창구 생각이 잠시 스쳐 간다. 그땐 여직원들이 30분 일찍 출근해서 윗사람의 책상부터 깨끗이 훔치고 난 뒤 일과를 시작했다. 가끔 윗사람의 심부름으로 차 한 잔씩 갖다주기도 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했다. 수고 많다며 알아주는 상관의 배려에 힘이 솟으니 사람이 살아가는 미덕이었다. 차 한 잔의 예절에서 사람의 됨됨이가 엿보이기도 했다. 가끔 윗사람은 예절 바른 여직원을 마음에 두었다가 중매하여 좋은 인연을 맺어준 일도 있었다. 요즘은 여직원에게 차 한 잔 부탁 하다가는 성희롱죄에 걸린다고 한다. 급속도로 각박해진 세상살이가 되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뭣이 옳고 뭣이 그르다고 판단하기도 어려우니 그저 씁쓸하다. 요렇게 착한 커피 자동기계가 여직원을 대신하니 성희롱 걱정은 없어졌지만 오가던 정겨운 그림은 어디 갔을까.

차 한잔하러 들른 날은 통장정리 하러 온 것처럼 통장정리용 기기만 괜히 건드려 놓고 나간다. 친절 교육이 몸에 밴 창구 직원들이 일제히 “어서 오세요”를 큰소리로 내는 바람에 민망해지기도 한다. 손님이 적은 시간대에 은행을 들러선지 은행원의 지나친 호의가 거슬렸다. 밝고 가벼운 미소와 눈인사로 적당히 건네도 충분하건만, 이 또한 치열한 경쟁 사회의 문화가 빚어낸 넘쳐나는 풍경이다. 창구까지 가지 않고 한쪽 귀퉁이에서 커피만 내려오는 내 뒷모습이 괜스레 켕긴다. 하긴, 커피 한잔도 보탬이다. 어쩌면 더 큰 보탬일지도 모른다. 장사하는 집에는 물을 많이 마셔주어야 좋다는 속설도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사람이 자주 드나들어야 한다는 속설까지 은근슬쩍 보태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돌아 나오는 내 등 뒤에서 또 일제히 합창한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연갈색 커피 한잔을 들고 바깥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손끝으로부터 스며드는 따뜻한 기온에 마음이 아늑해진다. 피어오르는 향을 음미하듯 천천히 입술에 갖다 댄다. 조금씩 조금씩 혀끝을 거쳐 목구멍을 적시며 넘어가는 그 연한 맛은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봄비인 듯 달다. 은은히 파고 드는 바닐라향이 머릿속까지 청량하게 스며든다.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누가 봤다면 실성했다고 했을 것이다.
행복한 아침이다. 자아도취라도 좋다. 오늘 나와 인연이 닿는 모든 이에게 행운의 길목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마저 생긴다. 한 모금 더 들이키려고 컵을 입 쪽으로 가져오는데 컵 속에 불청객이 들었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벌레다. 벤치 위 곰솔 가지에 붙어살던 어린 송충이도 차 한 잔하고 싶었는가 보다. 커피는 한잔 더 내려오면 될 터, 오늘은 내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마저도 긍정으로 보인다. 오가는 자동차 소리가 끊임없지만, 이 시간만큼은 그다지 소란스럽지 않다. 헤이즐넛에 푹 빠진 내 마음이 다 걸러버렸다. 가끔, 나는 단돈 이백원짜리 차 한 잔으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어본다.

이윤희

 
ⓒ 경산신문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과 비평작가회,
대구수필문예회.
경산문인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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